정운공 순의비는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지정기념물 제20호로 되었으며, 다대동 산 144번지인 몰운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정운(鄭運)은 1543년(중종38)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 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昌辰)이었다.
영암(靈巖)이 본 고향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 웅천현감(熊川縣監)을 거쳐 제주 판관(濟州 判官)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는 전라좌도 녹도(鹿島) 만호(萬戶)에 기용돼 있었다.
이 녹도 만호일 때의 1592년 9월 1일(음력) 이순신장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병선 400여척과 싸워서 100여척을 격파할 때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右部將)으로 군사의 맨 앞장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1798년(정조22)에 정운공의 8대손 정혁(鄭爀)이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그 임지내의 명소인 몰운대를 택해 정운공의 공덕을 추모하는 순의비를 세웠는데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종현(閔鍾顯)이 비문을 짓고 훈련대장(訓練大將) 서유대(徐有大)가 글씨를 썼다. 비면에는「忠臣 鄭運公 殉義碑」8자가 적혀 있고, 비음(碑陰 : 비신의 뒷면)에는18행(行)으로 정운공의 순절사적(殉節事蹟)을 소상하게 밝혔다.
비문에는 정운공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雲)자가 자기 이름자인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충장공 실기(忠壯公 實記 : 정운의 시호는 충장이었다)와 충무공 전서(忠武公 全書)에는 정운공은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동안 비석만 서 있었는데 1974년 부산시가 비각(碑閣)을 세웠으며, 이 비석은 높이 172㎝, 넓이 69㎝, 두께 22㎝ 규모이다.
국가유산명 | 현 황 | 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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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공 순의비 | 조선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