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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경관  특색있고 매력있는 생태보존, 문화도시의 사하로 놀러오세요.

다대동  위치가 표시된 사하구 지도

다대동(多大洞)은 낙동강구(洛東江口)에 자리잡고 있어 옛날부터 국방의 요새지로 주목을 끌어온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자비왕조(慈悲王條)의 기록을 보면 5년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쳐서 사람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6년 봄 2월 왜인이 삽량성(梁山)에 침입했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17년 일모(一牟)•사호(沙戶)•광석(廣石)•답달(畓達)•구례(仇禮)•좌라(坐羅) 등 성(城)을 쌓았다.

<五年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六年春二月 倭人揷良城 不克而去 十七年 築一牟•沙戶•廣石•畓達•仇禮•坐羅等城...>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답달(畓達)은 다대(多大)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답달」의「답(畓)」은 인마잡답(人馬雜畓)으로 거듭(重)을 의미 또는 현(顯) 저(著)를 의미하며, 오늘의 다대(多大)의 뜻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記)에도 다다라진•다다라(多多羅)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란 일본 고서(古書)에는 다다라(多多良)라고 한 것을 보면,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다다라(多多羅)•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地名)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는 것이다.

다대동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5~6000년 전부터라고 생각한다. 몰운대(沒雲台) 북쪽에 남겨놓은 다대포 패총(貝塚)으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대포 패총(貝塚)의 아래문화층에서 기하문계(幾何文係)토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발견되고, 윗문화층에서 회색(灰色) 경질토기계통(硬質土器系統)의 유물(遺物)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두 문화는 성격이 달라 신석기시대 말기에 아래층 문화의 사람이 살다가 버리고 간 뒤에 윗층 문화의 주민이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토기편 이외의 유물로는 흑요석, 골각기(骨角器) 등이 있으며, 사슴뿔로 만든 칼자루도 발견되었다. 이 시대에는 어로(漁撈) 중심의 경제생활이었다. 신석기 시대에 이어 청동기(靑銅器) 시대인 마제석기(磨製石器)의 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다대포 북쪽 응봉(鷹峰)산의 옛 봉수대(烽燧台)에서 수 점의 마제석부(磨製石斧)와 석검(石劍)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현 성창기업 자리에 반도목재주식회사(半島木材株式會社) 공장을 건설할 때 마제석검(磨製石劍) 한 개가 출토되었는데 김해(金海) 무계리(茂溪里)와 괴정동(槐亭洞)에서 나온 석검과 동일하다. 다대포는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와 마주 보고 있는 곳이며, 3세기경부터 일본과의 교섭이 있었으므로, 한국문헌인「삼국사기(三國史記)」나「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은 없지만 일본측 문헌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라진은 지금의 다대동 또는 다대포지역인 것은 분명하다.

대저(大渚)까지 포함시키는 설도 있고, 장림포설(長林浦說)도 있으나, 왜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한일통교상(韓日通交上)의 요지였기에 일본측의 사서(史書)에 자주 나온 것이다. 여말(麗末)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고, 약탈이 시작되면서 대마도와 마주하고 한반도의 입구에 자리한 다대포는 왜구에게 짓밟혔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이다.

다대포는 국방의 요새로서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7진(慶尙佐道七鎭)「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가운데 국방의 요새지로 가장 중요시하여 다른 진(鎭)의 2배의 병선(兵船)을 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가운데서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와 한만국경의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만은 무장(武將)으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만으로 임명하였으니, 이것은 수사(水使 : 수군절도사)와 동격이었다. 이러한 수군명장(水軍名將)들이 근무한 다대포에는 선인(先人)들의 무공(武功)을 알려 주는 많은 유적(遺蹟)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윤흥신(尹興信) 첨사를 비롯한 다대포 주민의 항전(抗戰)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한 왜적은 서평포진(西平浦鎭 : 舊平洞)을 함락하고, 이어서 구름떼 같이 다대포진(多大浦鎭)으로 침공하여 왔다. 이에 윤흥신 다대첨사가 지휘하는 아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전해지는 기록은 빈약하여 안타깝다. 이 전사(戰史)는 다대포의 영광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다대포는 우리 수군과 대결하던 제일선이오, 격전지였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부산포를 총공격할 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가장 아끼던 선봉장으로 왜적과 다대포 앞 바다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공(鄭公)이 전사한 곳이 몰운대(沒雲台) 앞 바다이며, 여기에는 정공의 순절을 기리는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다대성(多大城)은 석축둘레 6,960m이고, 성내(城內) 면적은 26,162㎡인데 현재 남아 있는 옛날 건물은 몰운대로 이전된 첨사영(僉使營)의 동헌(東軒) 하나뿐이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첨사가 정무를 보던 건물로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다대진성 내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유일한 건축유구(建築遺構)로 다대진이 혁파된 후 공가(公家)로 방치되던 것을 다대포실용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다가 다시 다대초등학교 교사로 전용되었고, 지금은 몰운대에 옮겨져 있다.

윤공단(尹公壇)은 다대초등학교의 구석진 곳에 비석만 우뚝 서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는데 1970년 485,000원의 예산으로 현재의 주산(主山) 산정으로 옮겨 세우고, 1976년 1,742,000원의 예산을 들여 비석단(碑石壇)을 개축하고 홍살문을 세워 정비하였다.

윤공단은 현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몰운대(沒雲台) 정상에 일본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정조(正祖) 22년(1798)에 세워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종현(閔鍾顯)이 찬술(撰述)하고, 훈련대장(訓練大將) 서유대(徐有大)가 쓴 것이다. 이 비석은 정운공의 8대손인 정혁(鄭爀)이 다대첨사가 되어 세운 것으로 높이 172㎝, 폭 69㎝, 두께 22㎝의 화강암이다. 첨사영(僉使營)이던 다대포 성지(城址)가 현재 다대동 일대에 일부나마 남아 있다.

윤흥신공이 최후를 마쳤던 다대포진(多大浦鎭)의 성벽은 지금 밀집한 주택들의 담이 되었고, 동문(東門)은 다대포 삼거리 옆이며, 서문(西門)은 옛 당산(堂山) 밑이며, 남문(南門)은 기로당(耆老堂) 앞에 있었고, 북문(北門)은 다대초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길로 변해 흔적도 없다.

동네안에 동그마니 남은 야문(夜門) 주춧돌과 주택으로 변한 선소(船所)가 다대포의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다대포 동회(洞會)에 전승되어 오던 무관복(武官服)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충렬사에 진열되어 있다. 그 옷을 언제 누가 입던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마을에서 농악꾼들이 입고 춤추던 것을 부산시사(釜山市史) 편찬위원회에서 입수하여 보관하였던 것이다. 또한 갑옷과 투구, 다대선생안(多大先生案)이란 책자가 함께 발견되었으며 다대포 첨사 명부는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소실되어 찾을 수 없고, 지금의 명단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몰운대(沒雲台)는 안개가 잦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몰운대는 신석기(新石器) 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살았으며, 패총(貝塚)을 남기고 있는 곳으로 낙동강 하구(河口)에 길게 뻗어서 안개나 구름이 끼면 그 속에 가리워 없어진듯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몰운대라는 낭만적이고 시화적(詩畵的)인 이름으로 예부터 불려온 경승지(景勝地)이다. 여기에 서서 푸르른 창파(滄波)와 날아다니는 해조(海鳥)를 바라보는 정경도 좋으며 특히 강구(江口)의 낙조(落照)를 바라보는 흥취(興趣)는 천하의 절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몰운대는 신라(新羅) 이전에는 동백(冬柏)이 우거진 작은 섬이었다.

16세기 초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中宗) 39년(乙未年) 2월 을사조(乙巳條)에 몰운도(沒雲島)라 적혀 있고, 1763년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조안의 해차일기(海擄日記)에 나전소도(羅前小島)였다는 말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은 몰운대가 옛날에 섬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불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의 사실을 근거로 몰운대가 적어도 16세기까지는 하나의 섬이었고, 16~18세기 사이에 낙동강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몰운대가 언제 육지와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낙동강 유사(流砂)가 파도에 밀려 강구(江口)에 자연적인 사구(砂丘)가 형성되면서부터 섬이 육지와 이어진 것으로 본다.

산림이 울창한 몰운대에 있는 다대진 동헌(東軒 : 부산광역시지정 문화유산 제3호)과 정운 장군의 순의비(殉義碑 :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20호) 그리고, 다대동 입구의 윤공단(尹公壇 :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9호)이 임란 당시의 처절한 격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위 다대성 8경(八景)은 지금도 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 아미완월(峨嵋[山]翫月) → 峨嵋半月
  • 몰운관해(沒雲[臺]觀海)
  • 야망어창(夜望[臺]漁唱)
  • 화손낙조(花孫[臺]落照)
  • 두송만취(頭松[山]晩翠)
  • 남림숙하(南林宿霞)
  • 팔봉반조(八峰[山]返照 ) → 八峰奇岩
  • 삼도귀범(三島歸帆) → 三島 : 쥐섬, 고리섬, 솔섬

그러나 솔섬으로 가는 길목엔 목재공장, 주택이 들어서 지금은 남림숙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옛 첨사영 밑에 다대「샘」이 있다. 이 샘은 다대포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때부터 주민 전부의 식수로 사용되어 왔으며 상수도가 설치된 이후에도 일부는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수량이 무진장하여 종일 길어 내어도 한밤중에는 물이 철철 넘쳐서 물줄기가 끊어진 일이 없었고 샘에서 넘치는 물을 받아 아래에 10평 남짓한 곳에 공동 세탁장을 만들어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감을 이고 와 빨래하는 빨래터였다. 옛날 상수도 설비가 없었을 때는 700여 세대 4,000여 인구가 이 샘 하나를 식수로 사용하였고, 어업 용수까지 부족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다대포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대포진(多大浦鎭)은 세종 이후 만호영(萬戶營) 이었으나, 임진란전에 첨사영(僉使營)으로 고쳤다. 효종(孝宗) 3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지금의 수영(水營)으로 복치(復置)된 이후 7진(七鎭)중의 하나이던 다대포의 방비군(防備軍) 규모는 전선(戰船) 2척, 수군(水軍) 2,160명, 무학사부(武學射夫) 236명이었고, 좌수영 상비군(常備軍) 편성함대에서 좌사파총(左司把摠)을 다대첨사가 맡았다. 좌사파총전선(左司把摠戰船)에는 사부(射夫) 18명, 교사(敎師) 5명, 포수(砲手) 24명, 능로군(能櫓軍) 120명이 있었으니, 오늘의 다대동은 군사상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 다대영(多大營)에 배치되었던 예비병력(豫備兵力)은 전선(戰船) 2척, 사후선(伺侯船) 4척이었으며, 몰운산(沒雲山), 두송산(頭松山), 금티산(金峙山)의 세곳에 병고(兵庫)를 두었다. 이러한 군제(軍制)는 갑오년(1894) 구군제(舊軍制)가 폐지될 때까지 240여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대동 뒷산에 응봉 봉수대(烽燧台)가 있었다. 여기에 봉수대가 생기기 전에는 석성(石城 : 天馬山頂) 봉수대에서 다대포 만호진(萬戶鎭)을 방수(防戍)하는 후망소(侯望所)로서의 임무를 맡았었다. 이 봉수대는 세종(世宗) 7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중종(中宗) 25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다대포의 응봉(鷹峰) 봉수대가 첨가되고 있다. 이것이 다대포 응봉 봉수대가 처음 보이는 기록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무렵 다대포 지역에 염분이 있어서 소금을 생산하여 관아(官衙)에 납품했음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 기록된 다대포 군수염분일좌(軍須鹽盆一坐)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대포진(多大浦鎭)은 1894년 6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정부기구가 변모함에 따라 경무청 관제가 공포됨으로써 부산경무관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국 각 지방의 군사시설과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군대는 해체당한 뒤 1895년 5월 폐진(廢鎭)되었고, 박세혁(朴世赫) 첨사를 마지막으로 한낱 어촌(漁村)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다대포에는 1906년 일본 후꾸오까껜에서 어민들이 이주해 왔다. 지금의 현대APT앞 바다에서 멸치가 무진장 많이 잡혀 지예망 어업이 성행했다. 지예망 어업은 바다에 그물을 치고 육지에서 잡아당겨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 잡은 멸치를 마른 멸치로 만들어 남포동에 가지고 와 객주에 넘겼다. 임진왜란 때 격전장이었던 다대포 앞 바다는 일제(日帝)말 미군(美軍)의 그라망함재기가 여객선 가모메마루를 격침, 일제의 패망을 예고했던 곳이다.

그리고 1953년 1월 부산에서 여수간을 운행하던 여객선 창경호(昌慶號)가 다대포 앞 가덕도에서 침몰하여 330여명이 사망한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1939년 구한말(舊韓末)의 정객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처음 국기로 사용했던 박영효가 서울에서 죽자, 다대포의 가족 묘지에 매장했다. 당시의 대규모 장례 광경을 처음 보게 된 부산 사람들의 한동안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구한말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고,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여 김옥균(金玉均)과 같이 나라의 정치를 새롭게 바꾸는 데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던 박영효는 1907년에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그는 한일합방에 협조한 일은 별로 없었다고 보지만, 일본 사람들은 박영효를 합병 유공자로 작위를 주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하여 그의 만년은 한국의 저명인사로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에 풍수를 동원하여 전국 방방곡곡 이름난 산을 찾아 자기가 묻힐 묘자리를 물색하다가, 명당이라고 하는 다대포 본동을 묘지로 결정하였다. 그는 조선총독 제등(濟藤)을 움직여 광범한 국유림(國有林)을 불하 받아 묘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인 옹주(翁主)를 비롯한 백씨, 형수를 이곳 분묘에 먼저 매장하였고, 1939년 자기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유언에 따라 여기에 묻히게 되었다.

박영효의 유해는 서울에서 특별차로 부산까지 운구되어 일본사람인 경상남도 도지사의 지휘로 부산역에서 다대포까지 길가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화려한 장례를 치루었다. 이같은 화려한 대규모 장례식을 부산 사람들은 처음 보았고, 그 장례식 행렬이 부산 특히 다대포 고로(古老)들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말한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한국 개화의 선구자 현현거사(玄玄居士)의 무덤앞 석비(石碑)에 일본 황실(皇室)에서 부여된 작위(爵位)가 새겨져 있어, 해방 후 비문의 망신스러운 귀절을 깨뜨려 버렸고, 비석도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졌다.

1958년 박 영효의 장손 박찬범(朴贊範)은 가산을 완전 탕진하고, 불하 받은 선조의 산소까지 팔아먹은 뒤에 남은 1,000여평의 묘지도 팔아 버렸다. 그는 조부모의 유골을 파헤쳐서 이장하고, 명당으로 알려진 이 묘소를 사겠다고 나선 암남동 돈 많은 요리집 주인에게 거금 500만환을 받고 소유권을 이전해 주었다. 이 묘지의 새주인은 미리 자기의 묘비까지 세워 놓고 10여년 동안 죽음을 기다리다가 그 관속에 들어가 묻혔다. 초라한 하나의 어촌이 되어버린 다대포는 해방후 6ㆍ25동란 뒤까지 밀수배들의 밀수 근거지로, 일본으로의 밀항 근거지로 당국에서 감시를 주력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다대동은 어촌이기 때문에 다른 동보다 신당 건물과 성역의 규모가 큰 다대포 성황당이 있다. 그리고, 홍티부락에는 상조대신(上祖大神), 당상조모(堂上祖母)의 위패를 모셔 놓고, 1월 초순에 당제를 지낸다. 1970년대에 다대동은 그 면모가 일신되었다. 몰운대가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開場)되어 관광명소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부터 다대지구 택지조성을 비롯하여 아파트 단지의 조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숨결이 꿈틀거리는 다대동으로 이사를 와 날로 발전하고 있다. 다대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다대포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티동을 병합하여 다대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서구 사하출장소에, 1975년 부산시 시직할출장소, 1983년「사하구」로 개칭되었다. 1992년 9월 1일 구 조례 제242호로 다대동이 다대제1동과 다대제2동으로 분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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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