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경관  특색있고 매력있는 생태보존, 문화도시의 사하로 놀러오세요.

하단동  위치가 표시된 사하구 지도

하단동(下端洞)은 당리, 신평, 사상구 엄궁동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 명지동과 마주 보고 있다. 하단의 지명(地名) 유래는 낙동강 끝이란 의미가 담겨 있으며,「아래치」「끝치」라고 풀이된다. 동래부지(東萊府誌) 편찬 당시엔 사천면(沙川面) 상단(上端)ㆍ하단(下端)이 있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사천면 하단에는 786호(戶)의 호수(戶數)가 있었다.

동래읍내(東萊邑內)의 호수 1,165호에 비하면 동래 다음의 대집단부락(集團部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래부지 및 경남여지(慶南與地) 집성(東萊邑誌)에 보면「舊草梁里는 官門에서 三十七里에 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구초량」은 하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하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4세기경의 철기시대(鐵器時代)부터가 아닌가 한다.

하단진(下端津)에서 신평, 장림쪽으로 조금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하단동 패총(貝塚)이 있다. 김해문화기(金海文化期)의 패총으로「모래구찌」라고 불리는 산곡(山谷)에 있다. 옛날에는 강물이 이 산골짜기까지 들어갔던 듯 토층(土層)에 사역층(沙礫層)이 형성되어 있다. 산이 평화스런 경사를 이루며 3면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면만 강을 향해 열려 있다. 패총에서 출토된 유물(遺物)은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패총밑의 갈밭이 있는 늪지대에서도 김해기(金海期)의 토기편이 출토된다.

하단 동편의 산 모양이 범과 비슷하다 하여「호복구(虎伏口)」라 부른다. 그 산기슭 낙동강가에 신선암(神仙岩)이라 부르는 큰 암석이 하나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에 신선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신선암은 바위밑에 작은 굴을 형성하고 있어서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주거지(住居地)일 가능성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1934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맡은 일본인이 이 바위를 깨어서 돌을 이용하려고 몇 명의 석공을 불렀다. 한 석공이 돌을 깨뜨릴려는 순간 즉사(卽死)했다고 한다. 그 뒤 이 원인불명의 죽음이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감히 이 바위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다.

에덴공원은 다대포 몰운대와 함께 부산의 팔선대(八仙臺) 중의 하나로 강선대(降仙臺)라고 불렀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두루 다니며 산세(山勢)를 살피다가 이곳에 이르러 동쪽 맞은 편에 있는 산을 보니 마치 학이 웅비하는 듯하다고 하여 승학산(乘鶴山)이라 지었고, 그 산에서 신선이 학을 타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하여 강선대라 불렀다. 이 강선대를 중심한 산의 소유주가 독실한 기독교 교인이 되어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기리어 에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을 개발하여 도시인의 휴식공간과 함께 관광명소를 이루기 위해 제반시설을 갖추었다. 그 당시(1970년대)만 해도 강변에 야외음악당과 공연장, 그리고 토속적인 술집들로 젊은이의 광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원 입구에 에덴공원이라는 팻말을 세웠는데 그 당시 이 앞을 지나는 버스 차장이 정류소 이름으로 활용함에 따라 지금까지 에덴공원이라고 불리어 지고 행정상 지명도 에덴공원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하단은 갈밭이 많아서 갈대나 갈꽃으로 일용 수공품을 만들었고, 지붕과 울타리도 갈대를 사용하였으며, 땔감으로도 이용하는 등 갈대와 주민 생활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1973년 당리ㆍ하단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많은 농경지구가 주택지로 바뀜에 따라 갈밭 무성한 옛날의 낭만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단포(下端浦)는 부산항 개항(開港)(1876년) 당시 부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모였고, 이곳에서 다시 낙동강 물을 이용하여 내륙지방에 운반되던 상업의 요지였다.

당시 상인들은 인근 명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싣고 삼랑진(三浪津), 왜관(倭館), 상주(尙州)로 드나들며 나락과 교환했다.

하단포에는 나락을 사들여 도정(搗精)하는 객주업(客主業)이 발달하였고, 소금과 곡식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1892년 7월 처음으로 기계 시설에 의한 부산정미소(釜山精米所)가 생기면서 하단포에 닿은 낙동강 유역과 김해평야의 나락이 이곳으로 운반되어 정미소로 들어가기도 하고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미곡(米穀) 거래 시장으로 하단의 번창은 대단하여 부산에서 대티(大峙)만 넘으면 모두 하단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따라서, 상품이나 농산물의 교역지(交易地)로 흥청댔고, 구포(龜浦)와 함께 큰장(市場)이 섰던 곳이다. 부산장, 하단장, 동래장은 그 당시의 이름난 장이었다. 지금은 수운의 쇠퇴와 도시발달로 인해 많이 위축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2일 7일이면 5일장인 하단장이 서고 인근 김해(金海), 명지(鳴旨) 등에서 장꾼들이 몰려든다.

일본이 이른바 대륙 경영을 하려면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고 하여 1898년 9월 대한제국(大韓帝國)과 경부철도합동조관(京釜鐵道合同條款)을 맺는데 성공하여 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190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인 1896년에 일본 영사(領事)가 사냥꾼처럼 꾸민 기술진을 보내 철길을 놓기에 알맞는 곳을 찾아 한반도를 둘러보게 했었다. 네 차례에 걸쳐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린 그들은 삼랑진에서 낙동강 서쪽 강가를 건너 하단동과 괴정동을 거쳐 지금의 대티터널쯤에서 굴을 뚫고 대신동을 거쳐 동광동에 종착역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만일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오늘의 하단을 비롯한 사하구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朝鮮鐵道史 참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당시 하단동의 주민들과 객주들은「쇠말이 들어오면 동네가 망한다」고 하여 이곳에 철도가 부설되는 것을 맹렬히 반대하여 철길이 북부산(北釜山)으로 깔렸다고 한다. 1897년 8월 부산이 낳은 선각자 박기종(朴琪淙)씨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철도를 부설할 것을 계획, 부산과 하단동 사이에 길이가 6㎞인 철길을 놓으려고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였다. 정부의 허가를 얻어 일부 착공까지 했으나, 하단 주민들과 객주들의 맹렬한 반대 운동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위와 같은 원인으로 경부선 철도가 사상(沙上)을 경유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하단의 번창했던 영화는 철도 부설뒤 몰락하기 시작했다. 열차편을 이용한 물자의 운반으로 정미업이나 그 밖의 교역지는 자연적으로 하단에서 구포로 옮겨지게 되었고, 화륜선(火輪船)과 각종 상선(商船)이 분주하게 오가던 낙동강엔 옛 동산유지(東山油指) 옆에서 명지(鳴旨)로 오가는 도선만이 옛 영화를 반추할 뿐 적막에 젖어 있다. 구한말(舊韓末)까지 큰 포구로서 번성했던 하단은 매년 낙동강의 홍수로 그 하상(河床)이 높아져 좋은 포구(浦口)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잃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30년 부산부(釜山府)가 9만석(九萬石)을 수용하는 분뇨(糞尿)탱크를 하단에 만들어 대티고개의 투기장에 버린 분뇨가 지하구(地下溝)를 통하여 이곳에 저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저장된 분뇨는 낙동강으로 뻗어나간 분뇨관을 통하여 배출되어 분뇨선(船)에 실려 김해평야로 나가기도 하고, 낙동강에 버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에 이주해 오는 사람이라곤 없어졌고, 하단을 메마른 빈촌으로 만들었다. 일제시대 몰락한 하단에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 와서 낙동강의 수질이 김(海苔) 양식에 최적지라는 것을 발견하고「미야꼬」란 일본인이 양식용 대(竹)를 일본에서 구입, 하단을 중심으로 신평, 다대, 장림 등지에 해방전까지 김(海苔) 생산을 기업화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

교역지(交易地)로 번성하던 하단포에는 1909년 하단리(下端里) 우편소(郵便所 : 하단우체국)가 생기고, 그 전해인 1908년에 현 사하(沙下)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사립 양정학교가 설립되어 당시 부산지방에서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후의 하단은 쓸쓸한 한촌(寒村)이었다. 명지(鳴旨)로 건너가는 나루터로서 면목을 유지했고, 부산시내로 들어오는 학생과 명지 등에서 반출되는 야채를 받아들이는 조그마한 선착장에 불과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낙동강에 펼쳐진 갈대밭과 하단의 명물인 재첩과 고시라기 회를 찾아 나오는 시민들의 발길이 보이는 정도의 조용하면서도 낭만적인 시골 마을 그대로였다. 그러나, 도시개발과 근대화의 물결은 하단에도 밀려 왔다. 1966년 5월 22일 7개년 계획으로 길이 2,030m 폭(幅) 18.74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낙동대교(洛東大橋)가 이곳에 착공되자 하단은 교통의 중심지가 두 번째 될 뻔했다.

그러나 하단동은 큰길과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지 남해고속도로의 낙동교가 북구 구포동에 새로 들어서기로 결정된 뒤로는 기둥받침대만 몇 개 세워 놓은 채로 공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래서 낙동교의 꿈은 좌절됐으나, 하단 분뇨처리장의 폐쇄와 구획정리 사업으로 일약 도시화로 발전되었다. 도로는 신설 포장되고, 구포까지 강변도로가 사상 공단 설치와 함께 신설되었고, 신평ㆍ장림공단 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낙동강을 가로막아서 바닷물 유입을 차단하여 부산시 상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낙동강하구둑 건설공사의 1987년 완공으로 명지, 진해를 잇는 교량이 생겨 하단동의 모습이 더욱 새롭게 바뀌었다.

하단동 하면 갈대와 고시라기, 재첩과 철새를 연상하는 곳이다. 하단포구(下端浦口)의 영화는 간 곳 없고, 오직 그 자리에 재첩을 파는 식당이 몇 개소 있을 뿐이다.

낙동강의 낙조(落照)와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 보호된 동양최대의 철새도래지의 철새떼의 비상하는 장관을 우리 모두가 보호하고, 에덴공원도 잘 가꾸어 도시인의 휴식 공간과 함께 관광명소로 조화를 이루도록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하단동은 교육의 중심지로 탈바꿈을 하였다.

1975년 5월 1일 서구 서대신동에 있던 부산 여성교육의 명문인 부산여자고등학교가 하단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한 것을 필두로 건국중ㆍ고등학교의 이전, 그리고 사하여자중학교, 부산고등교육의 요람인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의 건립 이전으로 명실공히 교육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하단동은 전술한 바와 같이 기원전 3~4세기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 하단(평림동)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에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釜山府)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단동이라 하여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고,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서구 사하출장소에 1975년 부산시 시직할출장소, 1983년「사하구」로 개칭되었고, 1992년 9월 1일 구 조례 제242호로 하단동이 하단제1동과 하단제2동으로 분동 되었다.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담당자
문화관광과 서태영 (051-220-4082)
최근업데이트
2019-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