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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경관  특색있고 매력있는 생태보존, 문화도시의 사하로 놀러오세요.

신평동 망후촌(亡後村)

임 경업(林慶業) 장군은 충주(忠州) 출신으로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다. 어려서부터 무술(武術)에 능하여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무과 (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인조(仁祖) 2년 (1624)이괄 (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안현(鞍峴)싸움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훈일등(勳一等)을 받았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청(淸)의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나라에 원병(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당시의 영의정(領議政)이었던 김 자점(金自點)의 반대로 좌절되어 마침내 왕족이 피난갔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었고, 왕이 피난가 있었던 남한산성(南漢山城)도 포위당하였다.

인조 20년 (1642) 청이 금주(錦州)를 포위하자 임장군은 명(明)과 내통(內通)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탄로되자 명나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의 남경(南京)을 함락하매 드디어 청나라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청 나라에서는 부귀를 약속하면서 달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으므로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때마침 대신(大臣) 심 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임장군이 관련되었다 하여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장군을 본국으로 송환케 하였다. 인조는 임장군이 모반에 관련이 없음을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반대파인 김 자점 등의 반대,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때 안동 김씨(金氏) 김 자점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상 당할 판국이 되자 임장군의 조카이던 절충장군(折衝將軍) 임 중생이 의주(義州)에서 이곳 신평까지 피난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잡으러 올까 보아 자꾸 뒤를 돌아 보았다. 그래서 망후촌(望後村)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백성들로 부터 영웅시된 임장군의 전기는 소설화하여 林忠愍公實記, 林忠臣傳, 林慶業傳 등의 책이 나와 조선때의 전쟁소설로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졌는데, 그중 林忠愍公實記는 정조의 영(令)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이로부터 임장군에 관계되는 전설이 전국 방방곡곡에 생기기 시작했고, 그의 사당(祠堂)도 곳곳에 세워졌다.

신선암(神仙岩)

하단 동평의 산을 「호박꿈(虎伏口)」이라고 부른다. 산의 모양이 마치 호랑이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숲이 울창하고, 높지 않은 산이기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살아 온 하단 주민의 꿈이 어우러져 있다. 호박꿈(虎伏口) 산기슭 낙동강변에 신선암(神仙岩)이라 부르는 큰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 있다. 「신선바위」는 700리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낙동강 물이 감싸고 돌아 넓은 평야를 이루고, 뒤로는 호박꿈의 산줄기가 숲을 이루어 묻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산기슭 끝에 있어 그 아름다운 정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정취에 도취된 신선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에 따라 신선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치는 신남초등학교 후문으로 옛모습은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에덴공원에 있는 강선대(降仙臺)에도 신선이 내려와 앉았다는 바위가 있으며, 이같은 전설은 원시신앙(原始信仰)내지 후세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선암은 바위밑에 작은 굴을 형성하고 있어서 선사(先使)시대 주거지(住居地)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1934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맡은 일본인 청부업자가 호박꿈 산기슭 낙동강변에 우뚝 솟은 이 바위를 깨어서 -조선사람들의 전해 오는 전설을 깨뜨릴 목적으로 -돌을 쓸려고 몇 사람의 석수장이를 불렀다. 한 석수장이가 연장을 가다듬어 일을 시작할려는 순간 갑자기 즉사하였다. 그 뒤 이 원인불명의 죽음이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었고, 지금까지 이 바위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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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서태영 (051-220-4082)
최근업데이트
2019-07-01